한국전쟁 당시의 UN 참전국,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 - 3편

2018. 7. 3. 22:30 Military/한국전쟁



1편, 2편에서는 한국전쟁 참전국들 9개국에 대해 알려드렸습니다. 이번 3편에서는 그 외의 UN 참전국(파병을 보낸국가)들과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들에 대해 전부 알려드리겠습니다.



2편에서와 마찬가지로 3편에서도 별도의 서론 없이 시작합니다. 3편으로 나누어 올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1, 2, 3편을 한 편에 올리려니 양이 많아져서요...


열 번째는 태국입니다. 태국은 미국 다음으로 UN안보리에 파병을 통지한 나라입니다. 태국은 안보리에 7월 29일 북한의 침공에 대응한다는 공식발표를 한 후 1만 4천 9백 98명 규모로 21전투단을 창설했습니다. 


태국은 연인원 6326명이 참전해 보병대대 1개, 프리킷함 7척 수송선 1척 수송기 편대 1개 편대가 참전해 129명의 전사자, 1139명의 실종자, 5명의 실종자를 냈습니다. 태국은 유엔 회원국들 중 최초로 물자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1950년 11월 7일에 첫 참전한 태국은 미국 제 2보병사단에 소속되어 평양 탈환명령을 받은 미군과 개성, 수원, 오산지역에 배치 되어 전투를 하는 등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수송기편대는 미 공군 21병력수송대대 소속되에 활동하였습니다.


태국은 세 번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현대전에서는 총알을 다 사용했을 때 총과 총검, 신체 등으로 양편이 뒤섞여 싸우는 육박전)과 역습으로 물리치고 포크찹 고지(강원도 철원군)를 지켜낸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태국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 한 사람들 중에 고위직이 많이 배출되었는데요. 3명의 총리와 5명의 부총리, 4명의 국방장관, 20여 명 이상의 차관급 관료, 장성급 178명 등의 인사가 나왔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72년까지 태국군은 한국의 포천시 영북면에 주둔하여 포천지역 재건에 기여 했습니다. 이후 국방부가 1974년 태국군의 참전비를 영북면 문암리에 세웠습니다.


태국군 2사단 21연대 참전용사와 인사중인 황교안 국무총리 2016년 10월 11일 

<사진 = 원본은 국무총리실, 사용한 사진은 NEWS 1>

훈련중인 태국군 <사진 = 국가보훈처 블로그>


열 한 번째는 남아프리카연방(현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입니다.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50년 11월 16일에 첫 참전해 826명이 참전해 34명의 전사자, 9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참전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고, 유엔의 활동에 상당히 협조적 이었기에 1950년 7월 1일 유엔 안보리에 성명을 냈고, 한국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미국과 협의를 거쳐 그 계획을 의회의 승인을 거쳐 중대급의 규모를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투비행대대를 파병하였는데요. 처음에는 정규군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할 계획이었으나 예비군, 민간인들의 엄청난 지원에 결국 군 당국은 대대급의 규모로 파병하기로 하고, 1950년 9월 4일에 출항해 1950년 11월 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투기 등은 본국에서 가져오지 않고 미국의 극동기지에 도착하면 즉시 현지 조달하는 방법으로 미국으로부터 구매교섭에 합의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중동부 아프리카 전선에서 '날으는 표범'이라는 별명이 붙은 공군 제 2전투비행대대를 참전시켰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행편대는 주로 서부전선에 출격해 적의 병력집결지와 야전보급소를 공격했고, 북한지역의 철교, 육교, 터널 등을 폭격하는 차단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열 두 번째는 그리스입니다. 그리스는 4992명의 군인이 참전해 188명의 전사자, 45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리스는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고련과 그 위성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그리스 국내의 공산당과 내전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호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미국의 군사원조가 훗날에 더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참전했다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만 1, 2차 원주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리스는 1950년 12월 1일에 첫 참전해 보병대대 1개와 수송기 편대 1개가 참전했습니다. 


그리스는 여단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1950년 가을부터 유엔군의 승리가 많아지면서 파병부대를 축소해 스파르타대대를 파병하였습니다. 모두 자원병을 통해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스파르타 대대는 이천 부근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임진강 부근 등에서 많은 전투를 치뤘습니다. 수송편대는 장진호 전투를 지원했고, 미군의 해병사단을 직접 지원해 전사자, 부상자를 후송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열 세 번째는 에티오피아입니다. 1951년 5월 6일에 한국에 첫 참전한 에티오피아는 3518명의 참전군이 121명의 전사자와 538명의 부상자를 낸 나라입니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황제가 있는 왕정국가였습니다.


한국에 참전하게 된 계기가 다른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에 의해 침공을 당했었습니다.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 셀라시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에티오피아인 27만 명이 죽고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계속 투쟁하여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고 다시 에티오피아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때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한 설움을 잘 아는 에티오피아제국의 황제 셀라시에 황제는 UN의 파병요청을 받자 4개 정규 사단 중 최정예 부대인 황제 직속의 제 1근위 사단에서 지원자를 모아 1개 대대를 편성해 파병합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황제는 '강뉴대대'라는 호칭을 내립니다. 이 '강뉴'의 뜻은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와 '적의 초전에 경파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겨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강뉴대대는 1951년 5월 7일에 한국에 도착해 미군이 제공하는 무기로 재무장하고 6주간의 적응훈련을 거쳤습니다. 미 제 7사단 32연대 예하대대로 배정고, 정찰 간 적과의 교전을 비롯한 고지탈환, 고지 사수, 진지 방어 등의 253번의 전투 모두에서 승리하는 저력을 발휘하였고, 1952년 10월 금화지구의 '철의 삼각지'를 사수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한국을 도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철의 삼각지에서 에티오피아군은 4시간 동안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은 전투 중 부상자와 사망자를 전장에 남겨두지 않고, 포로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적해 구출해냈습니다.


이러한 에티오피아군은 정준 후 연천과 동두천 지역에 주돈하면서 철원지역의 휴전선 경비를 담당하였고, 한국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지원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이후 1956년 3월 연락 장교단을 남기고 부대가 완전히 철수 합니다.


안타깝게도 에티오피아는 심각한 기근 등으로 국가 주요 산업인 목축업이 몰락해 최빈민국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시절 방한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나 1974년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수립된 멩기스투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폐위 되었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에게 황제가 하사한 재산과 땅, 연금 등은 몰수 되었고, 오랜 기간 냉대와 차별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 과도정부의 수립으로 연금이 다시 지급되고, 이명박 대통령 당시 에티오피아를 돕기위한 법이 제정되었고, 2010년부터 한국에서는 참전용사 후손 현지 장학사업을 진행하는 등의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에티오피아 참전군인들은 아직도 냉대와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에티오피아의 최극빈민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의 훈시에 보면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싸워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전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지만 단지 자신들이 받은 설움을 한국이 받지 않지 않게 하기 위해 희생한 에티오피아가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68년 5월 18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 <사진 = 국가기록원>

훈련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군 <사진 = 국가기록원>



열 네 번째는 룩셈부르크입니다. 1951년 1월 31일에 첫 참전한 룩셈부르크 군은 총 83명이 참전해 2명의 전사자와 15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소련의 팽창을 우려했고, 나토의 일원으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룩셈부르크군은 UN군 중 가장 적은 수의 군인을 파병했습니다. 파병 요건인 1000명이 되지 않지만 인구가 20만명의 작은 나라이기에 대규모의 군인을 파병할 수가 없었기에 룩셈부르크 소대를 벨기에 대대에 통합해 파병하였습니다.


룩셈부르크군은 1955년 8월까지 한국에 주둔하였습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2개 대대, 900명의 상비군이 있는 나라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700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83명이 참전한 사실은 정말 엄청난 파병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열 다섯 번째는 콜롬비아입니다. 1951년 5월 8일에 첫 참전한 콜롬비아는 총 5100명이 참전해 163명의 전사자, 448명의 부상자, 28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이 콜롬비아의 참전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 회원국으로 직접적인 병력 지원을 통한 참전이었습니다.


콜롬비아는 참전에 따른 무장, 훈련, 보급 등의 문제를 놓고 미국과 오랜기간 협상하느라 실제 참전은 늦어졌지만 지상군 1개 대대, 프리깃함 1척을 파병하였고, 지상군은 미군의 제 24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금성 진격전투에서 대대장이 부상을 입는 등 피해를 입었지만 목표고지를 확보하였고, 다른 여러 전투에서도 혈전을 치루었습니다.





<의료지원국>

한국 전쟁에 의료지원을 한 국가들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선 의료지원을 대한민국측에 한 국가들을 살펴보면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가 있습니다.


스웨덴은 1950년 9월 28일에 첫 지원을 시작해 총 1124명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영세 중립국가이었던 스웨덴은 1개 야전병원단이 파견되어 1957년 4월까지 한국에서 6년 6개월 동안 중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인도는 1950년 11월 20일에 첫 지원을 시작해 총 627명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인도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과 같이 영국연방에 속한 나라로 중립노선을 지키려 하였으나 유엔의 민간인 구호결의에 찬성해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한 제 60야전병원이 영국연방 제 27여단을 지원하였습니다.


덴마크는 1951년 3월 7일에 첫 지원을 시작해 총 630명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덴마크는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보내 많은 수의 부상자를 치료하였는데요. 8개월마다 본국으로 귀국해 재정비 후 재차 파견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1951년 6월 22일에 첫 지원을 시작해 총 637명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노르웨이는 적십자를 통해 지원금과 의류 등을 보내었고, 노르웨이 적십자가 편성한 이동 외과 병원은 동두천에서 미 제 1군단을 직접 지원해 부상자들을 치료하였고, 민간인들을 위한 외래환자 진료소도 설치 및 운영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1951년 11월 16일에 첫 지원을 시작해 총 128명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사실 이탈리아는 한국전쟁 기간 중에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십자연맹의 요청에 의해 이탈리아 제 68 적십자 병원이 본국을 떠난지 1달만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는 한국전쟁 참전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엔 비회원국이었다는 점이 특이한 점입니다.






<북한을 의료지원한 국가들>

북한의 의료지원국은 자세한 기록이 없기에 국가명만 밝히겠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입니다. 모두 소련에 의해 공산화된 국가들이란느 점이 공통점입니다. 

대한민국의 의료지원국가는 영세중립국도 있고, 민주주의 진영이 있는 것에 비하면 소련에 의해 북한을 지원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자 및 재정지원국>

사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후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유럽과 남아메리카 국가들도 한국을 지원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자국의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지원을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우선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당신들이 이 글을 보지 못하더라도 한국을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1951년에 지원한 국가로는 미얀마, 캄보디아, 코스타리카, 쿠바, 에콰도르, 헝가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자메이카, 일본, 라이베리아, 멕시코, 파키스탄, 베네수엘라가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경우 공산 정권이 집권하기 전이므로 지금과 달리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쿠바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화 되기 전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를 지원했다고 하지만 미군이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사서 우리나라에 참전하였고, 지원하였기에 일본이 한국전쟁에 지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의 여러 기구나 단체에서 지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다시 성장해 세계 경제 대국 2위로 일어설 수 있었고, 의료, 기기 등의 분야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수 많은 물자를 샀고, 미군의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 덕분에 살아난 나라이므로 한국전쟁에 남한을 지원한 나라로 저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1952년부터 지원한 나라는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온두라스, 인도네시아, 이란, 레바논, 중화민국(대만),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이 당시 베트남은 당연히 베트남전 이전이므로 공산정권이 아니었을 때입니다)입니다.


1953년에 지원한 나라는 칠레, 도미니카 공화국, 이집트,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파나마, 스위스, 시리아 입니다. 


1954년에는 아이티, 모나코,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서독이고, 1956년에는 리히텐슈타인, 바티칸이 우리나라를 도왔습니다.


이 외에도 지원 의사를 표명한 나라는 니콰라과, 볼리비아, 브라질입니다. 


반면 북한을 지원한 나라로는 몽골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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