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의 위치와 유례, 전쟁과 휴전이 길어진 이유, 한국전쟁

2018. 6. 13. 17:58 Military/한국전쟁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보면 동쪽으로는 올라가있고, 서쪽은 동쪽에 비해 많이 남쪽으로 내려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원도는 산이 많아 진군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고, 서쪽은 그나마 평지들이 있어서 진군하기가 쉬웠을 것 같은데 왜 그 올라가기도 어려운 동쪽으로 더 가고 평지가 더 많은 서쪽으로는 진군하지 않았을까요? 금강산을 가까이서라도 보고 싶어서 일까요?

정전협정, 종전협정, 휴전협정, 평화협정의 차이 - 한국전쟁, 6.25전쟁

남한말과 북한말의 언어 차이 - 다른 듯 같은말



한민족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소련과 미군에 의해 신탁통치를 1945년 8월 15일부터 받고, 남한의 경우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의 늪에 빠졌습니다.


북한의 인민군이 거의 괴멸된 상태에서 한국군은 압록강을 바라보았지만 조선민족을 해방시키자는 명분으로 중국 정부에서 만든 중국 민병대인 중화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위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화 되면서 UN과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이 휴전을 논의하게 됩니다.







이 휴전 논의는 말리크 소련 주재 유엔대표가 1951년 6월 23일에 휴전제의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말리크는 "38도선에서 군대를 상호 철수시키는 휴전을 위하여 먼저 교전국간의 토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전쟁을 끝내려는 진지한 열망이 있다면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6.25 전쟁(한국전쟁)은 소련이 비밀리에 북한에 탱크와 견인포 등을 제공하면서 전쟁을 준비 시켰는데 이제와서 그만하자고 하네요.


이 때 북한은 개성 내봉장(당시 북한의 점령지)에서 휴전회담을 할 것을 고집했고,  UN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북한의 요구조건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회담장에 들어설 때 백기를 달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UN이 북한에 항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UN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고, 사소한 일로 여겨 요구조건을 들어 진짜 백기를 차에 달고 회담장에 들어섰고, 나중에 북한 점령지에서 노획한 필름을 보던 중 이 장면을 미군이 항복하는 것처럼 제작해 방송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해서 한반도에서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휴전회담을 반대 했습니다. 그래서 휴전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되면 한국군을 UN군으로부터 빼 독자적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휴전을 계속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은 축출하려고 계획을 세우려 했었다는 것을 미국 기밀문서가 기밀 헤제 되면서 알려졌고, 우리나라 군 대부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위험을 무릎쓰고 휴전에 반대했고, 1953년 7월 27일 마지막 휴전회담에서 휴전협정을 UN과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이 맺게 되었고,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휴전을 하는 대신에 한국과 한미 상호 방위조약이라고 해서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한국이 자국을 침략 당한 것 처럼 그리고 한국이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군을 파병해서 돕는다는 협약을 맺습니다.







이런 협정을 맺고,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에 미군을 우리나라에 주둔시키게 해서 우리나라 방위비를 줄이고, 그 줄인 방위비를 전후 복구 비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신재임을 위한 개헌, 독재 등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점은 감사합니다.)


1951년 10월 25일 UN은 당시 북한의 점령지였던 개성에서 회담할 경우 굉장한 압박감 속에서 회담이 진행될 것을 우려해 널문이라는 지명으로 초가집 몇 채만 있던 외딴 마을인 지금의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을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판문점이라는 이름의 유례>

한국전쟁 전에는 널문이라는 지명의 외딴 마을이었는데 북한 점령지였던 개성보다 중립적인 장소를 물색하다가 개성으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휴전 회담 장소를 택했고, 이 장소가 당시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널문리에 있는 '널문리 가게(주막 겸 구멍가게)' 앞 콩밭이었습니다. 


<판문점의 위치>

1953년 당시 판문점의 모습 아랫쪽이 남한 방향임


당시 휴전회담은 UN군, 북한군 대표, 중화인민지원군 대표가 참석 했기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공용으로 사용하였고, '널문리가게'를 중국어로 표기하기 마땅치 않아 '판문점'으로 표기하면서 일개 이름없는 구멍가게 일대가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제가 위 사진에서 아랫쪽이 남한 방향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휴전협정문에 서명이 된 장소가 위 사진에 나오는 건물이 맞는데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생각이 나는 판문점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저 정전협정장소 보다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한 것입니다. 빨간색이 실제 정전협정조인 장소이고, 초록색이 판문점 북측인 통일각이고, 파란색이 JSA부대 앞입니다. 아마 이쪽이 민간인 통제선이겠지요? 안가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위 사진은 구글 지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Mattias Morrberg라는 찍어서 올려주신 것 같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정전협정조인장소를 찾아 클릭하면 이런 그림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가 실제 정전협정문 서명 장면입니다. 위 사진에 있는 테이블이 실제 정전회담 당시 사용했던 것일까요? 아시는 분 댓글 부탁드립니다.


<휴전회담이 길어진 이유>

1951년 10월 25일 이루어진 휴전협상에서는 군사분계선 문제로 난항이 이어졌고, 전선에서는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 고지전은 곧 군사분계선을 의미하므로 조금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UN과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이 엄청난 수가 죽어갔습니다.





1951년 11월 27일 UN과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은 군사분계선을 11월 27일 현재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데 합의 하였고, 3개월 내에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1951년이라고 하니 느낌이 오시죠? 네, 이 때의 휴전논의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유는 포로 송환문제였습니다. 왜 포로 때문에 문제냐고 하신다면 본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한느 포로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국이라는 것은 각자가 속해있던 군을 의미합니다. 즉, 국방군은 남한, 인민군은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은 중국을 의미합니다.


이 때 포로송환문제는 남측의 입장인 포로의 자유의지에 다라 송환하는 자유송환과 북측의 입장인 전원송환이 대치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남한의 포로는 10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고, 북한군 포로 중에는 남한 출신이지만 북한에 강제로 징집된 포로들도 있었고, 중화인민지원군 소속에는 중국의 국민당 장제스를 따르다 강제로 징집된 포로도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북과 중국으로의 송환에 거부함에 따라 휴전협상이 길어졌습니다.


여기서 아이러니 한 점은 UN측은 포로들의 권익을 최대한 보호한다는 재네바협정의 기본정신을 들어 포로들을 자유 의사에 따라 송환한다는 자유송환을, 공산측 역시 재네바협정의 포로들은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내용을 들어 포로들의 전원송환을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각 본국에서 설득을 하였으나 끝끝내 거부하는 포로들은 원하는 대로 갔지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스위스 중립국감시 위원회의 조사하는 사람으로 나타난 극중 이영애씨의 아버지처럼 남과 북, 중국, 대만 등 모든 나라를 거부하고 중립국인 스위스로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착상태에 빠졌던 휴전 회담은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153년 4월에 들어서자 공산측이 부상포로 교환을 하자고 하였고, 4월 11일 부상포로 교환협정에 공산과 UN측이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4월 21일 휴전에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송환을 거부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고 집을 주는 등 UN측에 휴전 반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UN군들은 집에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었고, 한국군과 북한, 중화인민지원군은 산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총 공세를 퍼부었고 이 시기의 포탄 소비량이 한국전쟁 통틀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1953년 7월 27일 소련이 휴전을 제의한지 25개월 만에 휴전협정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전쟁기간 동안 이루어진 본회담은 158번 정도 있었고, 예비회담 등을 합치면 그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상호간의 악수도 목례도 없시 휴전협정장에 들어서 휴전협정 문서에 UN군 수석대표 헤리슨과 북한측 수석대표 남 일이 서명했고, 3시간 후 UN군 총사령관 클라크에게 넘겨졌고, 북한은 김일성(본명 김성주), 중화인민지원군은팽덕회에게 넘겨져 승인 되었습니다. 이로써 휴전이 성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전선에서는 이런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이 뜻한 바 이루지 못하고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피를 흘려갔습니다. 정전협정문에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를 기해 휴전을 한다고 했기에 오후 10시까지는 양측이 총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당시 휴전소식을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렸다면 병사들이 전쟁을 제대로 치루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첫 휴전문제는 1950년 12월 유엔에서 논의 되었고, 이란, 캐나다, 인도의 3인 위원회가 휴전을 위해 중공군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유엔은 휴전결의안을 채택하고, 1951년 1월 초까지 중공군을 접촉하여 휴전협정을 모색했지만 중공군이 유엔의 휴전협정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좌), 정전협정문 한국어 원본(우)

<사진 = 국가기록원>

이로써 북위 38도선이었던 남 북간의 분단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습니다.

38선과 휴전선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비극입니다.


<자료출처: KBS 영상실록 1951, 1952, 1953편과 구글지도, 구글 이미지, 예전에 본 역사책 내용을 기억한 필자 뇌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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