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의 UN 참전국,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 - 2편

2018. 7. 2. 22:29 Military/한국전쟁



1편에서는 한국전쟁 참전국들 중 많이 파병을 보낸 국가들 중 참전일이 빠른 순서대로 상위 4개국을 알려드렸습니다. 이번 2편에서는 그 외의 UN 참전국(파병을 보낸국가)들 일부에 대해 알려드리고 3편에서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들에 대해 전부 알려드리겠습니다.



서론은 1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2편은 서론 없이 시작하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UN 참전국,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 - 1편


UN군 참전국 다섯 번째는 캐나다입니다. 1950년 7월 26일에 참전한 캐나다는 보병여단 1개, 구축함 3척, 수송기대대 1개가 참전해 연인원 25,687명이 참전해 312명의 전사자와 1212명의 부상자, 실종자 1명, 포로 32명을 냈습니다. 


캐나다는 북한의 기습 납침에는 소련의 공산화 확장 욕구가 이면에 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인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캐나다의 하원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5일 후에 한국을 지원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하였습니다. 


이 때 캐나다 하원은 "우리는 집단 안보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캐나다 정부의 어떠한 조치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캐나다의 수송기대대는 운송, 보급,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전쟁이 끝난 후 3년 동안 군 감시자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캐나다는 여단급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고, 영국연방 제 1사단의 일부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캐나다군은 교리면에서 영국과 유사했고, 같은 영어를 사용했고, 같은 국왕을 모시는 나라이기에 여러면에서 다른 영국연방 국가들에 비해 영국군과 잘 맞았습니다. 





캐나다 제 2대대는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뉴질랜드입니다. 영국 연방에 속한 뉴질랜드는 1950년 7월 30일에 첫 참전해 연 인원 5322명의 보병 1개 대대, 프리스킷함 1척을 파병하였습니다. 이후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8척의 함정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작전을 이어갔습니다.


뉴질랜드는 보병 1개 대대를 파견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름은 보병부대이지만 실제로는 포병대대를 파견했습니다. 섬나라이고 이웃 나라 중 큰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뿐이고,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부대와 다른 영국 연방의 국가들로부터 많은 기술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뉴질랜드 포병이었지만 가평 전투에서 중공구느이 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뉴질랜드는 1950년 7월 30일에 첫 참전을 해 연인원 3794명이 참전해 23명의 전사자, 79명의 부상자, 1명의 실종자를 냈습니다.


일곱 번째는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뉴질랜드보다 하루 앞선 1950년 7월 29일에 첫 참전을 해서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해 262명의 전사자, 1008명의 부상자, 7명의 실종자, 12명의 포로를 낸 국가입니다. 보병대대 1개, 구축함 한 척을 파병하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라 예비역들 중에는 전투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지상군을 파견할 때 현역병과 예비역 중에 지원자를 모집해서 3개의 소총 부대와 본부 중대, 지원 중대로 구성해 파견했습니다.


프랑스 대대의 대대장 몽클라스 중령은 2차 세계대전에서 중장으로 참전하였고,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는 예편된 상태였으나 프랑스가 대대급 규모를 파병한다고 하였을 때 중령으로 현역 복귀 신청을 해 참전하였습니다.


그 중 1개 소총중대는 해병대 출신, 한 개 중대는 파리 경비대 출신들, 다른 한 개 중대는 공수부대와 외인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어 1950년 10월 25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항하여 11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해 2주간 적응 훈련을 한 후 미군의 제 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프랑스 대대는 주로 중부 전선의 고지전에 투입되었고 지평리 전투가 가장 유명합니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이 지평리 여주를 동시에 점령하여 UN군을 갈라놓으려 하였으나 프랑스 대대, 미 23사단이 지평리에서 3일간의 고립에도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 중공군의 전략을 분쇄하였습니다.


여덟 번째는 터키입니다. 터키는 1950년 10월 17일에 첫 참전을 하였는데요. 1개 보병여단으로 연인원 14936명이 참전하여 741명의 전사자, 2068명의 부상자, 163명의 실종자, 244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터키는 3개의 보병대대, 1개의 포병대대, 수송부대, 의무병, 병기과 등을 포괄하는 여단급 전투단을 파병하여 독립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로 편성했습니다. 이 때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인 여단장 타흐신 아즈즈는 터키 독립전쟁과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해 승리로 이끌었던 장군입니다. 사실 이 여단장의 계급은 터키에서는 높았으나 한국전 참전을 위해 자신의 계급을 낮추었다고 합니다.


터키는 미국 제 25 보병사단에 배치되어 1년을 주기로 부대원을 교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 7년간 한국에 여단급 병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UN의 승인 하에 이루어 졌고, 이 기간동안 터키 제 7대 대통령인 케냔에브렌도 한국에서 복무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 정전협정, 종전협정, 휴전협정, 평화협정의 차이 - 한국전쟁, 6.25전쟁

아홉 번째는 필리핀입니다. 필리핀은 1950년 9월 19일에 첫 참전해 연인원 7420명으로 보병대대 1개가 참전하였습니다. 112명의 전사자와 229명의 부상자, 16명의 실종자, 41명의 포로를 냈습니다. 


필리핀은 UN의 요청에 의해 파병되었고, 대한민국에 파병한 국가들 중 5번 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습니다. 필리핀 한국 원정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필리핀군은 미국 제 1기병사단, 제 3보병사단, 제 25보병사단, 제 45보병사단 휘하에서 복무했습니다.





사실 필리핀은 독립 후 공산반란군과 교전상태 등으로 인해 국내정세가 불안했음에도 우리나라에 전차 17대, 1개 연대 전투단을 파병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필리핀은 한국에 도착한 후 10일 간의 적응훈련을 거치고 후방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수행하다 미 65연대에 배속되 임진강 부근을 공격해 거점을 확보하였습니다. 


남은 참전국과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등은 3편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UN 참전국, 의료지원국, 물자지원국, 북한쪽 참전국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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